80년대, 세계적으로
홈컴퓨터라는 말이 유난히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업무용 목적 보다는 집에서 취미, 놀이, 교육, 혹은 업무 보조 목적 정도로 쓰이는 것을 목표롤 판매 되었던 값싼 8비트 컴퓨터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조금 잊혀졌지만, 이 컴퓨터들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미국의 홈컴퓨터
@코모도어64는 지금까지도 그 어떤 컴퓨터보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컴퓨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코모도어64 광고)
IBM PC나 Apple II와 같은 좀 더
진지한 컴퓨터와 달리 이런 컴퓨터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 저렴한 가격
- 전용 모니터를 사지 않아도 되도록 TV에 연결 가능
- 느린 속도 또는 적은 RAM
- 대신 컬러 그래픽 또는 음악 기능 강화
- 게임 목적으로도 많이 활용됨
미국의 코모도어64 뿐만 아니라, 영국의
@ZX스펙트럼 등도 비슷한 느낌으로 많이 판매 되며 당시 컴퓨터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 했고, 특히 당시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홈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게임들이 널리 퍼지면서 자리를 잡기도 했습니다.
(ZX스펙트럼용 코만도 게임 화면)
그래서 요즘 일부 게임팬들에게는 이런 컴퓨터들이 코모도어64 용 게임이나 ZX스펙트럼용 게임을 할 수 있었던 일종의 고전 비디오 게임 콘솔처럼 인식되고 있기도 합니다.
80년대의 재믹스, 유일하게 성공한 한국의 게임 콘솔
한국에서는 80년대 홈컴퓨터라는 것의 기억이 없다시피 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한국에서 홈컴퓨터의 위치에 근접한 기종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MSX 기종들입니다.
(당시 대우의 MSX 컴퓨터 광고)
MSX는 일본의 아스키가 바로 미국의 그 마이크로소프트와 합작으로 개발한 컴퓨터 표준입니다. 그래서 이 표준을 따르는 기계를 만들면 어느 회사 하드웨어건 소프트웨어는 돌려가며 쓸 수 있다는 생각을 노린 것입니다. 아스키가 큰 역할을 한 만큼 소니, 파나소닉 같은 일본의 주요 전자회사들이 MSX 기종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금성(현 LG전자), 대우 등이 MSX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MSX 컴퓨터는 당시 세계적인 홈컴퓨터 유행에 대충 들어 맞았습니다. 텔레비전에 연결하기 좋았고, 컬러 그래픽과 음악 기능이 다른 기종 보다 괜찮았습니다. 다만, 한국의 소득 수준이 아직 한참 떨어지던 시절이라 당시 MSX 컴퓨터는 결코 영국사람들이 ZX스펙트럼을 볼 때나, 미국사람들이 코모도어64를 볼 적만큼 싼 값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MSX는 소프트웨어 호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개발된 게임들을 그대로 한국산 MSX 컴퓨터에서 돌려 볼 수 있었고, 덕분에 다양한
게임들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아주 홈컴퓨터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메탈기어 시리즈도 원래는 MSX2 용으로 처음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MSX 하면
게임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비록 다른 나라의 홈컴퓨터만큼 널리 보급은 못되었지만, 한국에서 MSX가 홈컴퓨터의 위치에 어느 정도 다가섰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그 덕택에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재미난 아이디어가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바로,
재믹스입니다. 이 컴퓨터를 게임 콘솔로 둔갑시켜 팔아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재믹스의 성공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초창기의 저성능 MSX 컴퓨터는 점차 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 갔습니다. 이때, 대우에서는 간단하고 싸게 MSX 컴퓨터를 재구성하고 키보드를 제거한 대신 게임을 하기 편하게 조이스틱을 기본으로 편성해서, 이 컴퓨터를 게임 전용 콘솔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믹스입니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모델인 재믹스V)
이미 80년대 초부터 나온 MSX용 게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갖고 놀 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상당히 많았던 상황이었고, 가격대도 적당했던대다가, MSX 컴퓨터를 생산, 유통, 유지/보수, 수리 지원 하던 경험을 그대로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보급도 잘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MSX는 소프트웨어를 롬카트리지(롬팩)에 담기 좋았습니다. 이것은 다름 홈컴퓨터에 비해 게임용 콘솔로 MSX를 쓰기 유리한 결정적인 장점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홈컴퓨터인 ZX스펙트럼이나 코모도어64는 주로 카세트 테이프에 소프트웨어를 담았는데 이런 것은 읽어 들이는데 시간이 대단히 오래 걸렸습니다. 플로피 디스크에 소프트웨어를 담고 디스크 드라이브를 쓰면 훨씬 빨라지긴 했지만, 이 시절, 보통 디스크 드라이브는 돈을 따로 주고 사야하는 한층 값비싼 주변기기였습니다.
그에 비해, MSX와 재믹스에서 사용하는 롬카트리지는 거의 즉시 소프트웨어를 읽어 들일 수 있어서 매우 빨랐고 다루기 간편했습니다.
(남극탐험(남극대모험) - 코나미에서 MSX용으로 개발 했고, 재믹스 사용자들도 널리 즐겼던 MSX의 대표게임 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다른 외국의 콘솔이 본격 수입되기 전에 재믹스가 먼저 게임 콘솔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발상 자체는 이미 비슷한 해외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아타리5200만 해도 사실 아타리 홈컴퓨터 기계와 부품과 설계를 돌려 쓰는 것으로 볼 수 있었고, 일본의 토미퓨타 같은 기계 역시 홈컴퓨터로 팔아 보려다가 별 볼 일이 없으니 게임기로 다시 재구성 해서 판매한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나라별로 상대적으로 따져 보자면 재믹스만큼 성공한 사례도 잘 없었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후반이 되자 MSX 컴퓨터 자체보다도 재믹스는 더 잘팔려나갔고, 세계적으로는 닌텐도와 세가가 콘솔 게임 시장을 지배하던 90년 무렵까지도, 국내 보급 대수로는 재믹스가 둘을 앞섰습니다. 따져 보자면, 닌텐도의 패미콤은 보급 대수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해적판 기계도 많이 유통되었기 때문에 재믹스가 90년, 91년 시점에서 국내 게임 시장을 압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적어도 80년대말 국내에서는 대우에서 만든 재믹스가 닌텐도와 세가가 없는 틈을 타서 얼렁뚱땅 1위였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알기로, 해외의 사례까지 살펴 봐도 이렇게 MSX를 콘솔로 만들어 성공시킨 곳은 한국의 대우 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덕택에, 비록 조잡한 표절 게임이 많긴 했지만 국산 게임 소프트웨어도 MSX, 재믹스용으로는 몇 가지 나왔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것들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MSX용으로 제작된 국산 게임 대마성)
그러니, 조금은 과장입니다만, 만약, 정부와 매체에서 "전자오락은 공부의 적"으로 몰아가면서 어떻게든 망하게 하려는 분위기만 없었다면, 한국에서 자생적인 비디오 게임 문화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추억하게 될 정도 입니다. 실제로 재믹스가 1985년 발매 되었으니, 1983년 발매된 패미콤 보다는 시기가 좀 쳐지지만, 패미콤의 미국 출시 시점인 1985년이나, 유럽 출시 시점인 1986년보다는 뒤지지 않습니다. 한국 비디오 게임 생태계는 재믹스와 MSX를 중심으로 보면, 자체 하드웨어 개발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있었고, 내수 사용자층도 적지 않게 쌓여가고 있었으며, 소수이지만 아마추어 개발자와 매니아들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돌아 보면, 한국에서 개발한 비디오 게임 콘솔 중에 역사상 성공한 것 역시 80년대의 재믹스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설계와 규격 자체가 일본 아스키 주도의 MSX를 이용한 것이니 순수 개발은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닌텐도와 세가 같은 거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에 보호된 시장을 먼저 독차지한 것 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컴퓨터 회사로서 대우가 그런 개방된 규격을 잘 이용하고 이해해서 적절한 시기에 콘솔로 재구성한 것은 꽤 인정할만한 개발과 시장개척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애플 같은 컴퓨터 회사 조차도 콘솔을 출시 했다가 처참히 말아 먹은
@피핀의 역사가 있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좀 더 눈길이 갑니다.
이후로 3DO 같은 비슷한 시도가 있기도 했고, GP32처럼 휴대용 게임기로 주목을 받은 기계가 나온 적도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재믹스만큼 성공한 사례는 없었던 듯 합니다. 그러고보면, 세계적으로도 자기 나라에서 그정도 자리 잡은 자국산 비디오 게임 콘솔이 있었던 나라가 얼마나 있나 싶습니다. 다시 생각해 볼 수록 80년대, 한국 전자산업의 가능성이 생각보다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재믹스는 왜 성공했는데, OUYA는 왜 망했나?
2013년 OUYA라는 기계의 출시 소식이 들려 왔을 때, 저는 재믹스 생각을 했습니다.
OUYA는 안드로이드 기계를 비디오 게임 콘솔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게임들을 그대로 거실에서 TV로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MSX 컴퓨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길 수 있었던 재믹스와 비슷한 발상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OUYA 기계 모습)
그런데, 재믹스의 성공에 비해 OUYA는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이유는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데, 저는 대충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 재믹스는 아직 한국에서 홈컴퓨터도 생소했고 비디오 게임 콘솔도 생소했을 때, 한 영역의 제품을 다른 영역의 제품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수요를 창출한 제품입니다. 그에 비해, OUYA는 비디오 게임 콘솔도 이미 많이 퍼져 있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더 많이 퍼져 있는 상황에서 시도된 제품 입니다.
- 대우는 재믹스 이전에 이미 그 기반이 된 MSX 컴퓨터 제조사로서 경험과 자원을 갖고 있었지만, OUYA는 신생 업체로서 기반이 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태블릿에 대한 경험과 자원이 충분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재믹스의 성공은 흔히 말하는
앤소프 매트릭스에서
기존 제품(current product)을
신규 시장(new market)에 도입하는
신규 시장 개척 전략(market development)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규 시장 개척 전략을 어떻게 구상해 볼 수 있고, 어떨 때에 성공하는지, 재믹스와 OUYA의 사례는 예시가 되어 줄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OUYA는 실패했지만, 재믹스가 개척했던 방식으로 또다른 영역에서 또다른 상품을 구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 시장에서 무르익은 생태계를 다른 시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계 말입니다.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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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지기 곽재식
작가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공학 분야에 종사하며 안전, 환경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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