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에는 "반행(半行)"이라는 말을 춤추고 노래하는 것과 곁들여 신령에게 기도하는 굿과 비슷한 행사를 일컫는 말로 썼던 것 같습니다. 기은도감 에서 행했던 "기은"도 유사한 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려시대 때 부터 썼던 것 같은데, "반행원산림신야제(半行遠山林神野祭)"라는 말도 썼다고 합니다.
아래는 실록의 기록입니다.
- 세종11년 9월30일: 지금의 세속(世俗)은 오히려 옛 습관을 따라 무당과 박수의 요사하고 허탄한 말에 미혹(迷惑)되고 있어, 이를 높이고 이것을 신앙하여 어떤 때는 집에서, 어떤 때는 들에서 행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분수(分數)에 넘고 예(禮)를 지나쳐 명산(名山)의 신(神)에게도 〈누구나가〉 다 제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부로 음탕한 짓을 행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가산(家産)을 소비(消費)하며, 정욕(情慾)을 제멋대로 한껏 다하여 남녀의 분별을 혼란되게 합니다. 다만 서민(庶民)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경대부(卿大夫)의 집안에서도 습속이 되어 떳떳이 행하고 있어, 혹은 기은(祈恩)이라고 일컫고 혹은 반행(半行)이라고 일컬어 항상 춤추고 항상 노래하면서 왕래함이 잇달았습니다. 심한 자는 그의 부녀(婦女)를 거느리고 몸소 스스로 기도(祈禱)를 행하고도 태연하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또 선조(先祖)의 노비(奴婢)를 위호 노비(衛護奴婢)라고 일컬으며 선조의 신(神)으로 하여금 무문의 집에 기식(寄食)하게 하니, 신(神)이 만약 알음이 있다면 어찌 흠향할 수 있겠습니까.
- 세종8년 11월7일: 백성들이 구습(舊習)에 오래 젖어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조가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무당과 박수의 요망하고 허탄한 말을 혹신(酷信)하여 생사(生死)와 화복이 모두 귀신의 소치라고 하고, 음사(淫祀)를 숭상해서 집에서나 들에서 하지 않는 곳이 없사오며, 노래하고 춤추어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심지어 예(禮)에 지나치고 분수를 어기는 데 이릅니다.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에 사람마다 모두 제사지내며 떼지어 술 마시고 돈을 허비하여, 집을 결단내고 가산을 탕진하여 한 번 수재나 한재를 만나면 문득 굶주린 빛이 있사오니, 이 유행의 폐단이 가히 염려됩니다. 이것은 비단 세민(細民)들만 그러할 뿐이 아니옵고, 경대부(卿大夫)의 집까지도 대개 보통으로 여겨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사와, 혹은 은혜를 빈다고도 하고, 혹은 반행(半行)한다고도 하여, 귀신에게 아첨하는 등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습니다. 심지어 제 조상의 귀신으로 하여금 무당집에 가서 먹게 하니, 귀신이 만일 안다면 어찌 즐겨 받아 먹겠습니까. 심한 자는 제 계집과 딸을 데리고 가서 몸소 기도를 드리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오니, 한갓 귀신의 이치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또한 집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잃는 것입니다. 그 조상을 높이고 종가를 공경하는 예가 어디에 있사오며, 귀신을 공경하되 이를 멀리 한다는 뜻이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유래를 살펴 본다면 어찌 국가에서 이미 국무당(國巫堂)을 세운 까닭이 아니오며, 또 명산(名山)에 무당을 보내어 제사지내는 까닭이 아니겠읍니까. 사람마다 모두 이를 구실로 삼아 뜻대로 제마음대로 하는 등 조금도 기탄(忌憚)함이 없사오니, 실로 성대(盛大)한 정치에 누(累)가 되나이다.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에 각각 그 제사가 있는데 또 악귀(惡鬼)의 제사를 베풀었으니, 명문(明文)없이 모두 제전(祭典)에 편입시켜 놓으면 어느 귀신이 나오지 아니하겠습니까.
비슷한 의미로 좀 더 일반적으로 넓게 쓸 수 있는 단어인 들판에서 하는 제사, 야제(野祭)라는 단어를 쓴 사례도 많이 보입니다.
- 명종1년 7월19일: 임백령은 해남(海南)의 촌사람이요, 향리(鄕吏)의 외손(外孫)으로 의용(儀容)이 아름답고 언어(言語)가 공교로왔으며, 겉으로는 공손한 듯하나 속으로 칼날을 숨기고 있어 조그마한 혐의도 반드시 갚고야 말았다. 을사년 가을에 이기ㆍ정순붕ㆍ윤원형 등과 결탁하여 밀지(密旨)를 이용해 옥사(獄事)를 빚어냄으로써 대신(大臣)이 죽임을 당하고 일시의 현류(賢類)가 일망 타진되었으므로, 모두가 다 지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중에 병을 얻어 죽게 되자, 애써 일어나 애걸하는 모양을 지으면서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뒤에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하여 야제(野祭)를 지낼 때 무당의 말도 그와 같았으므로 듣는 이들이 자못 화제로 삼았다. 전성정(全城正)의 가난(家難)도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였는데, 이후부터 그 이웃 사람들이 길에서 임백령의 집 사람을 만나면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인 채 감히 흘겨보지 못하였고 참봉 성탁(成濯)도 담 쌓는 일로 서로 힐난하다가 마침내 형신(刑訊)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이웃 사람들 중에 그 화(禍)를 두려워하여 집을 팔고 이주하는 자가 많았다.
- 중종32년 8월28일: 남학(南學)의 하전(下典)들이 무녀를 명륜당에 불러 들여 크게 야제(野祭)를 벌였는데 겸교수 유공권(柳公權)과 김희성(金希聖), 겸훈도 김윤제(金允悌)와 김수옹(金守雍) 등이 알면서도 못 들은 체하며 보통으로 여겨 괴이하게 여기지 않아서 놓아두고 따져 묻지 않았으니 매우 무식합니다.
- 중종3년 3월10일: 민간에서 후하게 장사지내는 厚葬 폐단은 없어지고, 다만 무당이나 음사(淫祀)만을 믿어, ‘야제(野祭)’라고 일컫고 있으며, 또 불사(佛事)를 베풀어 재산을 다 없애 가면서 귀신에게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엄하게 금지해야 하는데, 반드시 위에서 먼저 스스로 금지한 후에라야 백성들이 곧 본받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조종(祖宗) 때로부터 기신재(忌晨齋)를 설치한 것은 예절에 어긋난 행사입니다. 신이 듣건대, 그 날 조종(祖宗)의 위패를 목욕하여 편문(便門)으로 인도해 들이고 정로(正路)를 통하지 않으며, 부처에게 마지(摩旨)를 올리고 중에 대한 공양을 마치기를 기다려 비로소 신위(神位)에 제사를 지낸다 하니, 선왕의 혼령을 더럽히고 욕되게 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 연산군11년 9월15일: 전교하기를,“가흥청(假興淸)의 이접소(移接所)에 죽은 나인(內人)이 있다. 그 염빈(殮殯)의 모든 일을 승지(承旨)가 가서 살피고, 해장 각사(該掌各司)의 제조(提調)는 모두 다 친히 그 일을 담당하라. 만약 소루(疏漏)함이 있으면 비록 제조의 높은 신분일지라도 매를 면치 못한다.”하였다. 나인은 원주(原州) 기생 월하매(月下梅)이다. 음률(音律)을 알고 희학(戲謔)을 잘 하여 왕의 뜻에 많이 맞았으므로, 왕이 늘 호방(豪放)하다고 칭찬하여 사랑이 컸었는데, 병이 나서 별원(別院)에 옮겨 있으매 왕이 늘 가서 문병(問病)하였다. 죽어서는, 왕이 애도(哀悼)하여 여완(麗婉)이란 칭호를 주고,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제전(祭奠)을 베풀게 하고, 지제교(知製敎)에게 제문(祭文)을 짓게 하였는데, 글이 뜻에 맞지 않으매, 곧 강혼(姜渾)을 시켜서 고쳐 짓게 하였으며, 친히 두세 번 전(奠)을 올리고는 번번이 통곡하였으며, 그 부모 형제를 불러서 인견(引見)하였다. 또 후원(後苑)에서 야제(野祭)를 베풀어, 왕이 비ㆍ빈(妃嬪)ㆍ흥청(興淸)들을 거느리고 친히 무당의 말을 들으며 더욱 비통(悲慟)해 하였다. 장사지낼 즈음에는, 이런 제사를 한두 번 베푼 것이 아니었고, 재상(宰相)들로 하여금 제사하는 곳에 와 모이게 하였으며, 추혜서(追惠署)ㆍ영혜실(永惠室)을 설치한 것도 다 여완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왕이 두어 해 전부터 광질(狂疾)을 얻어 때로 한밤에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後苑)을 달렸다. 또 무당 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주악(奏樂)하고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廢妃)가 와 붙은 형상을 하였으며, 백악사(白岳祠)에 자주 올라가 굿을 하였으므로, 궁중에서는 폐비가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 세조2년 5월7일: 근일에 한 상인(喪人)이 성 밖에서 야제(野祭)를 지냈는데, 남녀가 거의 수십 명에 이르렀고, 창아(娼兒)들도 참여하여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이미 잡아다가 논결(論決)하였으며, 또 한 무녀(巫女)가 남녀 10여 명을 모아 놓고 그 집에서 술을 마시었으므로, 부리(府吏)가 잡아다가 사실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모두가 그 사람의 일가친척의 남녀이므로 이들은 논죄하지 않았습니다.
- 세종13년 8월2일: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野祭)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 祟 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 오고 불상(佛像)을 맞아들여, 향화(香花)와 다식(茶食)을 앞에 벌려 놓고는 노래와 춤과 범패(梵唄)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오니, 수령들로 하여금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正長)ㆍ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 세종13년 5월15일: 신이 지난해에 하삼도의 절들을 순찰하였는데, 거의 다 혁파하여 버렸으나 음사(淫祀)만이 크게 성행하여, 반행원산림신야제(半行遠山林神野祭)라고 일컫고는 노비(奴婢)를 붙여 준다든가 혹은 재물을 맡기기도 하는데, 무식한 무리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사부(士夫)의 집에서도 모두 공공연하게 복(福)을 비니, 무당의 풍속을 이루 금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무속의 양태를 살펴 볼 수 있는 묘사 자료를 구할 만한 기록들입니다. 특히 연산군이 직접 굿에 심취했고 폐비 윤씨에게 빙의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는 것은 눈길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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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있는 페이지: 전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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